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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9/22   몸의 문화.
2005/09/21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 (彼女と彼女の猫) [1]
몸의 문화.
철학이라고 하면 대부분 고루하다, 따분하다, 현실과 동떨어져있다, 등등의 말을 듣게 된다. 하지만 나는 과연 그러한 것인가 라고 생각해본다. 철학의 정의란 무엇인가. 철학에 대한 사전적 정의를 살펴보면 “인생, 세계 등등에 관해 연구하는 학문.” 이라고 되어있다. 이것만 보면 확실히 철학이 무엇인지 인지할 수가 없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자. "Philosophy"라는 단어는 그리스 어인 "Philosophia"에서 유래되었다. "Philo"는 사랑한다는 뜻을 지니고 "sophia"는 지혜라는 뜻이다. 아는 것을 사랑한다는 뜻이다. 이건 또 무슨 해괴한 소리인가. 아는 것을 사랑하는 것과 인생, 세계 등등에 관해 연구하는 학문과 무슨 연관이 있다는 것일까? 우리는 알기 위해선 그것에 대한 궁금함을 가져야 하고 그 궁금함을 해결해야 한다. 즉 우리 주위의 모든 것을 궁금해 하며, 또한 그 궁금증을 해결해 나가는 학문이 철학이라는 것이다. 대학 학위를 보면 정치학, 경제학 등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따더라고 왜 Doctor of philosophy 라는 말이 붙는지는 이 철학의 어원을 통해 알 수 있을 것이다. 넓게 보면 모든 학문은 철학이라고 볼 수 있으니 말이다. 또한 어원에서 알 수 있듯 철학은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 아닌 현실과 아주 밀접한 학문이란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친구들에게 아는 철학자 이름을 대보라고 하자. 그렇다면 소크라테스, 데카르트, 니체, 칸트,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헤겔 등등 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철학은 서양의 학문인가? 그렇지 않다. 동양에도 공자, 노자, 주자, 그리고 부다 역시 철학자라고 할 수 있다. 왜 우리는 서양 사람들만 철학자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이다. 그러나 그 것이 고정관념이라고 해서 비웃고 넘어갈 일은 아니다. 고정관념은 사회의 현상이라고 볼 수 있을 만큼 어느 정도의 객관성을 지니고 있다. 즉 동양철학에 비해 서양철학이 우리의 머리 깊숙이 박혀있다는 것이고 현재의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은 서양철학이 대부분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우선 서양철학을 먼저 연구해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서양 철학의 시작은 탈레스라고 말한다. 탈레스 이전의 사람들은 그저 자연환경에 대해서 두려워하기만 했지 그 자연현상이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려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자연현상에 대한 우리의 생각만이 중요했지 그 자연현상 자체를 생각하려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탈레스는 현상 자체에 대해 생각했고 그런 이유로 탈레스는 철학의 시작이라고 불리게 된다. 확실히 초기 철학의 주제는 자연이었다. 자신의 근처에 있는 모든 것들은 자연이었으니 주제가 자연인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자연중심적인 사고를 했다. 그러다가 그들은 한가지 생각을 한다. 이것들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그리고 소급에 소급을 거쳐서 끝에 가면 모든 것의 제1원인인 신이 있다고 생각했다. 철학에 대한 이해와 깊이가 점점 심화되면서 자신에 대한 탐구도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라는 말이 인간탐구에 대한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우리는 사유하는 나 즉 정신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육체는 그저 다른 것들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정신이 아닌 육체가 중요시되기 시작했다. 정신의 아름다움보다는 육체적 아름다움과 쾌락이 중요시 되게 된 것이다.
왜 몸인가? 이 문제는 중요하게 다루어야 한다. 이 문제는 앞서 말했던 정신을 중요시 하던 것에 연관되어진 채로 이해되어야 한다. 나는 인간은 동물이고 생각한다. 인간은 이성적인 동물이라고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한 부분일 뿐이다. 어쨌거나 인간은 동물이기 때문에 이성으로 제어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인간의 삼대 욕구라고 한다면 식욕 수면욕 성욕 이 세 가지라고 할 수 있다. 생활체의 생리적 ·심리적 기구에 생기는 부족상태를 보충하고 과잉상태를 배제하려는 생리적 ·심리적 과정이라는 욕구라는 말 자체가 의미하듯 자연스러운 인간의 모습이다. 그런데 좀 더 생각해보자. 먹거나 마시는 식욕과 잠을 자는 수면은 인간이 목숨을 이어나가는 것에 있어서 필수 불가결한 행동이다. 성인이라고 해도 먹어야 살고, 자야지 살 수 있다. 먹지 않고 자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생물의 범위를 벗어난 것이다. 그러나 성욕은 어떤가? 섹스를 하지 않으면 죽는가? 정신에 이상이 오는가? 아니다. 섹스가 없이도 우리는 살 수 있다. 그런데도 인간의 가장 대표적인 욕구에 성욕이 오른다는 것은 그만큼 먹고 자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럽다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왜 우리는 성욕을 부끄러운 것으로 치부해 버리는가? 왜 입에 담기 껄끄럽다고 생각하는가? 용기를 내지 않으면 입에 담기조차 힘든 단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한번 말하고 나면 가슴이 콩닥콩닥 뛰어서 얼굴이 빨개질까 두려워 손으로 부채질하고 싶지만 손으로 부채질 하는 것을 남에게 자신이 부끄러워하는 것처럼 보일까 두려워 가상의 손을 만들어 머릿속으로 부채질을 하게 만드는 것일까? 어쩌면 그것은 사회가 우리에게 주입시켜놓은 이미지에 불과할 수도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그럼 그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냐? 라고 물어보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면 그 상식이라든지 개념이라는 것은 누가 우리에게 주었는지 한번 생각해보자. 사회가 성욕이 부끄럽다는 인식을 우리에게 심어놓은 것으로 인해 성은 음지로 내려가게 되었고 따라서 드러나지 않은 음성적인 형태로 우리의 주위를 배회하기 시작했다. 음성화 되어버린 것은 제제의 빈틈을 파고들어 더욱더 이상한 방향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사회가 개방적인 방향으로 나아가자 과거 우리가 외면했던 것들이 다시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성의 문화도 차츰 고개를 양지로 뻗었다. 그러나 이미 꼬일대로 꼬여버린 문화는 바르지 못한 양태로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몸의 문화다.
김형태씨의 책인 “너 외롭구나?” 라는 책을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잘생겼다는 말은 섹스하기 잘 생겼다. 라는 말의 준말이다.” 사실 우리가 사람에게 호감을 느끼든지 반감을 느끼든지 그것은 잘생겼다 못생겼다 같이 외모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것이 아니라 매력에 의한 것이다. 외모가 특별하지 않음에도 관심이 가고 대화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 유머러스하다든지 같이 있으면 편하다는 느낌이 드는 사람 등등 그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매력이다. 매력은 외모에도 비례하지만 정신에서 더욱 그 영향을 받는다. 물론 외모가 잘 생긴 것이 죄는 아니다. 또한 잘생긴 사람을 보고 반하는 것 역시 죄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지나친 외모의 추종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회가 외모보다는 매력에서 그 인간관계의 핵심을 찾아야 되는 것이다. 몸의 문화가 없어져야 한다는 것이 아닌 그 바라보는 시각을 바꿔야 함을 한 번 더 밝혀둔다.
21세기에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문제는 이 외에도 많을 것이다. 환경문제도 그렇거니와 20세기에서부터 죽 내려온 인간소외의 문제 역시 아직도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지금 막 일어나고 있는 문제를 처리하지 않으면 곪고 곪아서 나중엔 처리조차 못할 지경에 이를 수도 있기에 먼저 몸의 문화를 우리가 어떻게 봐야 할지를 먼저 살펴본 것이다. 현재 우리에게 던져진 이 화두를 어떻게 처리하는 가가 우리의 사회뿐만 아니라 개인의 생각이나 기준을 올바르게 만들 수 있는가의 중점이 될 것이다.
by 사유 | 2005/09/22 00:22 | 신변잡기 | 트랙백 | 덧글(0)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 (彼女と彼女の猫)

 


독특하군
by 사유 | 2005/09/21 17:34 | 머릿 속 찌꺼기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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